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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적 영화보기-「브루탈리스트」] 잘만든 연극 한편에 다큐멘터리를 얹은 이민사회와 자본주의의 충돌과 관용에 대한 영화

by 매드포지 2025.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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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나 전시회를 가면 있는 상영회?

브루탈리스트를 보고 나오면서 아내에게 영화가 꼭 박물관에서 전시의 일부로 상영하는 영화 or 다큐멘터리를 본 것 같다고 하니 아내가 격하게 공감하였다. 영화의 시작부터 앰비언트의 강렬한 사운드 그리고 핸드 카메라로 찍은 듯한 흔들리는 앵글의 카메라 무브. 그리고 가장 두드려졌던 것은 중간중간에 나오는 컷씬들이었다. 예를 들면 시간의 흐름과 인물들의 감정의 변화를 나타내는 하늘과 구름 등 풍경, 그리고 빠르게 달려가는 자동차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지나가는 도로들의 장면 장면이 박물관의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거기에 작은 70mm 카메를 통해 나타나는 흐린 화질의 영상미와 인물을 따라가는 카메라의 무빙 그리고 어딘가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하는 구도가 마치 박물관의 좁은 상영실 의자에 앉아 영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주었다.

아내나 나나 박물관이나 전시회를 좋아하기 때문에 국내에서 데이트를 하거나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갔을 때 항상 빠지지 않고 하는 관광 옵션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런 곳에 가면 항상 영화나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상영하는 곳이 있는데 코드만 맞으면 아내나 나나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나오곤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영화의 형식이나 방식에 익숙하기도 하고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위화감이 드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루탈리스트는 꽤나 신박하면서도 아주 강력한 여운을 주는 영화였다. 

박물관에서 하는 잘 만든 다큐멘터리나 혹은 영상을 보고 나면 정말 기나긴 여운이 남는 경우가 있다. 우리에게 의문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하고 지난 삶을 돌아보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혹은 건축, 전시, 미술 등을 통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사유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정말 그렇다.

이 영화는 40년대 전쟁 시기에서 냉전시대까지 있었던 브루탈리즘이라고 불리는 건축양식이자 사회 운동을 따르고 주창했던 브루탈리스트들에 대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브루탈리즘은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중간쯤 있었던 운동으로 비교적 짧은(?) 과도기적이고 조금은 과격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본적으로 이 브루탈리스트의 모태는 모더니즘이라고는 하지만 주류에 반대하여 강력한 표현을 주창하는 사람들로서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나있다. 영화는 이런 브루탈리스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전쟁에 쫓겨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이주민에 대한 이야기와 미국의 대공황 이후 전쟁으로의 경제 불안정 속에 있었던 미국의 자본주의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브루탈리스트라는 건축에 대하여 보여주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 당시의 시대를 대변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이 된다. 영화의 시각은 때로는 약자이자 핍박받는 이민자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또 때로는 원주민으로서의 미국인들이자 자본주의의 끝을 보여주는 강자들에 입장에서 영화를 이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건축으로 풀어낸 극 중 건축가이자 주인공인 라슬로 토스(Laszlo Toth)라는 인물에 대한 삶을 조명하고 있는데 이 건축가는 실존인물은 아니고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라는 건축가에 영감을 받은 인물로 실제와는 많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민자 Vs. 원주민(?) 자유를 위해 서로가 서로를 참는다?!

이 영화에서는 당시 시대에 있었던 문화의 대립 그리고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오래된 앙금을 여러 인물들의 관계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두 가지 키워드로써 축약을 하고 있는데 우선 첫 번째는 키워드는 영화 가장 초반에 나오는 괴테의 인용구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불쌍한 노예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The best slave is the one who thinks he is free.)'이 문구의 의미를 해석해 보면 자유에 대한 의지와 그 책임 그리고 착각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만큼 자유라는 것은 우리를 속이기도 쉽고 진정한 자유를 쟁취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민자들은 전쟁을 피해서 그리고 억압을 피해서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미국을 향해 왔다. 영화의 처음에 주인공인 라슬로가 배를 타고 처음으로 미국에서 보는 것이 자유의 여신상인데 이 자유의 여신상을 비추는 카메라가 여신상을 거꾸로 비춘 모습에서 이 자유의 뒤틀린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듯이 현대사회에서 진정한 자유는 자본이 있을 때 완성이 된다.

이민자로서의 라슬로는 친척집 그리고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사실상 빈민의 모습을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적어도 그때는 라슬로는 어떤 것에 매어있지 않은 진짜 자유를 보여준다. 하지만 자신은 돈이 없고 힘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회의 상류층을 만나서 깨닫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그 상류 사회에서 나오는 돈을 접했을 때에는 무언가 갇힌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이전의 가난한 시절에 있었던 자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라슬로는 광적으로 건축을 완성시기키 위해서 날카로워진다. 그것이 돈을 원해서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이미 그는 자본에 부패해 버린 것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반의 자유분방하지만 가난했던 때도 진정한 자유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도피 같은 느낌의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기만 하면 무언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이상향을 대변하는 미국이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또 다른 키워드는 영화의 중간쯤 나오는 '관용(tolerate)'이다. 이 관용이라는 부분은 라즐로와 대척점에 서있는 해리슨 리(Harrison Lee)의 아들인 해리 리(Harry Lee)의 대사에서 나온다. 영화는 라슬로가 해리슨에게 건축 의뢰를 받아 지역의 커뮤니티 센터를 짓는 것에서 급속도록 이 관계가 심화가 된다. 그리고 이제 건축을 시작하는 첫 삽을 뜨는 행사에서 해리슨 리는 술에 취해 라슬로에게 자신들이 라슬로의 가족을 참고 있다, "We tolerated you."라고 이야기를 직접 하는 것에서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직시하지 않았던 갈등이 시작이 된다. 원주민의 입장에서 사실 미국인 자체도 원주민이 아닌 정복자인데 스스로를 원래 거주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만용의 끝이지만 여하튼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이민자들은 기생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이민자들을 자신의 돈을 써가며 대접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관용을 베풀고 참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민자들은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하는 원주민들의 오만과 무례함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어쩔 수 없이 참아내고 있다. 자신들의 이름을 자신들이 생각하는 발음대로 바꾸어 부르고 괜찮냐고 물어보고, 미국에 오래 있었으면서 발음이 그게 무엇이냐고 핀잔을 주는 무례함을 보며 자격지심이자 불편한 시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무례하고 오만한 태도를 그들은 돈을 위해 아니면 자신의 입지를 위해 참아내고 있는 중이다. 이 논리는 사실 이민자와 원주민의 관계를 넘어서 강자와 약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조금 후에 해보도록 하자.

이 갈등의 정점은 이탈리아로 대리석을 고르러 같이 여행을 떠난 라슬로와 해리슨의 대화에서 확실시된다. 해리슨은 라슬로에게 '그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자신을 약물과 술로 자신을 스스로 해치고 다른 사람의 온정에 기생충처럼 기대냐'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공격할 빌미를 만들어주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해리슨은 약과 술에 취해있는 라슬로를 강간한다.

이 논리는 강자의 논리이자 원주민들이 이민자들을 바라보는 시산이다. 이 시선은 비단 50~60년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시선과 갈등이다. 그리고 미국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민자들을 배척하는 논리로 사용이 되고 있다. 이미자들 때문에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기고 또한 범죄율이 올라가며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배우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라는 인식이다. 한국사람들이 중국, 동남아, 북한 이민자들을 볼 때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다.

극단 적인 예로 영화에서 해리슨이 라슬로의 아내에게 영어를 잘 구사한다고 하면서 어디서 공부를 했냐고 물어보자 라슬로의 아내인 에르제벳(Erzsébet Tóth)은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과 함께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대학도 나온 고학력자이며 일반 대학이 아닌 세계의 유수대학을 나왔다는 것에 오히려 자격지심을 얻을 것 일 것이다. 우리도 이민자들을 만나 대화를 하다 보면 좋은 대학을 나온 것에 놀랄 때가 있는데 이것이 같은 논리임을 알 수 있다.


강자의 논리와 약자의 논리는 양립할 수 없지만... 그것이 사회다!

이런 논리는 서로가 이해가 되지 않는 완전한 대척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양립할 수 없는 대척점이 존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비단 이것이 이민자와 원주민의 입장이 아니라 결국은 강자와 약자로 치환이 될 수 있다. 강자는 강자 나람대로 약자를 이해하지 못하며 재능이 있는데 노력하지 않는다고 하고, 자신들이 돕는 것이 아까운 적선정도라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약자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강자들이 독식하는 세상에서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 더해 노력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해도 결국 현실을 살아내기 바쁘다. 중립에서 바라보면 둘 모두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둘의 논리가 적합한 것은 아니다. 마치 양비론처럼 둘을 다 부정하거나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 둘의 입장 차를 이해하고 다시 생각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이런 모순된 논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인정하고 서로 상호 간의 신뢰를 쌓아야 하는 것이다.

예전 유학을 할 때를 회상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조언이라고 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무도 믿지 말라라는 것이었다(특히 한국사람!!). 약자가 약자를 등 처먹고 그리고 강자도 약자를 다시 등 처먹는 이미 신뢰가 깨진 사회인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안타깝게도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요즘 특히 한국사회를 보면 좌파 우파 진형을 나뉘어서 서로가 맞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파하고 있다. 물론 극우, 극좌의 경우에는 선을 넘는 추측과 거짓말로 선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은 차치하고 서로의 입장에서 보면 둘 다 이해가 가는 내용이다. 황희 정승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네 말도 맞고, 너의 말도 맞다"처럼 서로의 입장에서는 결국 맞는 그렇게 밖에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한 발자국 물러나서 보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 주고 양보를 하는 신뢰의 모습을 보여줘야 양립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게 서로의 주장을 강하게 하다 보면 결국은 공멸해 버리는 사회가 올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건축으로 승화를 시키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여운이 깊다. 영화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3시간 2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이 갑갑한 현실을 어떻게 타파할 수 있을지가 궁금하다. 하지만 그 문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전혀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결국 신뢰가 회복이 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그 문제는 더 고착화가 되고 심화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어떤 해답을 얻으려는 생각보다는 결국 현시 직시정도만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도 영화 마지막에 그러했듯이 우리는 며칠만 지나면 까먹고 다시 똑같은 논리로 싸우고 사람들과 척을 질 것이다. 영화도 어떤 해답보다는 마지막에 오게 되는 지향점 목적지(Destination)에 초점을 맞추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그 과정과 여정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같이 보게 될 지향점을 공유를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보고, 볼만했던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포스팅으로 남깁니다.
만일 오타나 해석 실수 등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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