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쉬기가 어렵다.

영화 감상에 대한 글을 쓸 때에는 글을 시작하기가 힘든 경우가 더러 있다. 대부분 2가지 형태로 글을 시작하기 어려운데 영화가 너무 어려워 해석을 할 수 없거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요소들이 너무 많아서 풀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라고 할 수 있다. 이 콘클라베(Conclave,2024)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너무 할 이야기도 많고 어디서 시작해야 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기 때문에 글의 서두를 열기가 참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콘클라베를 보고 나서 영화의 여운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대부분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의 경우에는 영화를 본 후에 크레딧이 어느 정도까지 올라갈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 영화는 금방 영화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마도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 자체가 그렇게 많은 생각을 요하지 않고 오히려 정직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집에 와서 글을 쓰기 위해 이 영화를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 정치적으로 진보와 보수의 격돌로 해석을 할 수도 있고 사회/종교 안에서의 여성에 대한 역할을 강조하며 페미니즘으로도 이 영화의 코드를 잡을 수 있다. 그리고 또 종교적으로 변화와 보수 그리고 신앙으로도 이 영화를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담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나 많기도 하고 오히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제작자 보다 해설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요소들이 곳곳에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화 콘클라베는 자칫 지루해지고 산만한 이야기를 담을 수도 있었지만 이 영화는 2시간이나 되는 러닝타임 동안 지루할 틈이 없이 온전히 몰입하게 되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드바르트 베르거 (Edward Berger) 감독의 전작인 서부 전선 이상 없다( Im Westen nichts Neues,2022)을 보더라도 굉장히 숨 막히는 영화에 많은 클로즈업 다채로운 인물의 감정묘사를 그리지만 전혀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있었다. 아직 비교적 신예(?)인 감독의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은 있지만 인물들의 클로즈업과 시선이 몰리거나 초점의 집중을 보여주는 씬들은 이 감독이 2 작품을 통해 꽤나 잘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본격적으로 영화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 영화의 가장 처음은 교황의 죽음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교황의 죽음을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 다루는 것보다 너무나 자세히 그리고 어쩌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추기경들이 교황의 죽음을 확인 후 일련의 종교적 절차 그리고 죽음의 선고 후 교황의 시신을 응급차에 싣고 가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면서 천주교에서 거의 신처럼 떠 받드는 존재가 죽은 것이 아닌 한 인간이 죽은 것과 비단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이런 분위기와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이 이야기가 비단 천주교라는 종교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권력과 정치가 있는 이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레벨로 즉, 신의 레벨에서 인간의 레벨로 내리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주인공인 로렌스인 레이프 파인즈로 초점이 바뀐다. 로렌스는 콘클라베를 준비하면서 많은 압박을 받고 주면에 시끄러운 소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난을 암시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 내면에 신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런 로렌스의 심리 상태와 문제는 영화 내내 '숨'에서 직, 간접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다. 마치 타르(Tar, 2022)라는 영화에서도 주인공의 예민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른 소리를 모두 지우고 조그마한 장치나 기계에서 나오는 소음만을 부각해서 사용한 것처럼 이 영화는 다른 소리를 모두 죽이고 로렌스가 쉬기 힘들어하는 '숨'을 통해 압박과 내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 내내 로렌스는 숨을 쉬기가 쉽지 않다. 거의 한숨과 같은 숨의 내뱉음 그리고 들이마시는 숨을 어딘가 모르게 막힌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로렌스에 우리는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 보수와 진보 거기에 제3의 세력까지 나타나는 이 콘클라베에서 중립적으로 진행을 해야 하는 입장에 선다면 어떤 누구도 그런 압박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개인적으로 로렌스는 '기도'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기도'가 가지는 의미는 엄청나다. '기도'는 하나님과 개인의 가장 은밀한 대화이고 이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 하지만 이 '기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단순히 대화를 넘어서 대화의 상대인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되었다는 말까지 이어지게 될 수 있다.
확신은 정말 우리를 병들게 하는가?

이런 로렌스의 '의심', '문제'는 콘클라베를 시작하기 전 그의 설교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이 설교는 이 영화의 주제를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감독의 인터뷰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라고 했지만 우리는 의심을 통해 확인하고 확인을 통해 포용하는 그런 신뢰와 관용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영화를 통해 느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로렌스의 설교 중 핵심이 되는 내용은
"Certainty is the great enemy of unity. Certainty is the deadly enemy of tolerance. Even Christ was not certain at the end... Our faith is a living thing precisely because it walks hand in hand with doubt. If there was only certainty, and if there was no doubt, there would be no mystery, and therefore no need for faith.(확신은 통일의 가장 큰 적이며, 관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예수님 조차도 마지막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의심과 함께 걷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만약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없을 것이고, 따라서 신앙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Certainty(확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우리는 반대의 '의심(Doubt)'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의심'을 통해 우리는 정말 신의 존재가 있는지 알 수 있고 그 의심을 통해 진실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점에 따라서 이 설교는 아마도 천주교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뒤집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설교는 아마도 많은 종교인들에게 쉽지 않은 도전과 불편함을 줄 것이다.
천주교와 기독교 등 구세주가 있는 종교에서는 이 의심이라는 것을 잘 다루지 않는다. 무조건 '믿음'을 강조하며 어떤 기적이나 혹은 은혜를 믿기 쉽지 않다면 무조건 믿으라는 마치 세뇌에 가까운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 종교이다. 그래도 요즘에는 알고 믿어야 한다는 생각을 꽤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또한 영지주의라고 치부해 버리며 금기시하는 사람들도 꽤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콘클라베 바로 전에 추기경들에게 하는 설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로렌스를 향해 다른 주교들이 보내는 눈총은 가히 '압박'에 가깝다.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을 당한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어쩌면 다른 주교들의 마음들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이 무조건적인 믿음은 '맹신'으로 바뀌고 더 나아가 '광신'으로 되면서 결국에는 인간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비종교의 교주에 의해 자행되는 행위, 그리고 그 신도들의 비상식적인 행위들을 보면 우리는 이 단편적으로나마 이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알 수 있다.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에서 우리는 이 '의심'을 기본모드로 장착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 '의심'이라는 것이 너무 과하면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으나 적절한 의심은 언제나 우리를 무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 로렌스의 설교에서는 '확신'이 자신이 믿는 것이 모두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는 '교만'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 이런 '확신'에 차있다면 결국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도 또한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할 수 없는 요즘 보이는 정치인 권력자들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본질을 잃어버린 어떤 것도 우리는 선택하면 안 된다.

이런 설교를 했던 로렌스는 자신의 말대로 교황 후보자들에 대한 의심을 계속해서 가져간다. 그들의 치부를 발견하고 용서하고 폭로하고를 반복한다. 하지만 결국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논리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차악의 선택이 자신이 교황이 돼야 한다는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정치나 사회에서 중립에 위치 아니면 양비론을 취하는 사람들의 선택에서 똑같이 발견을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런 모습은 2가지를 통해 분석해 수 있는데 '욕망'과 '잃어버린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로렌스는 자신이 교황이 되겠다는 '욕망'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성직자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 모두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택이 외부의 힘 = 폭탄테러를 통해 막히게 된다. 그리고 폭탄테러를 통해 소식을 듣기 위해 모인 추기경들은 어떤 신앙에 대한 문제가 아닌 외부적으로 보이는 자신들의 모습과 교리등을 앞세워 보수와 진보 혹은 자유와 개혁으로 파를 나누어 싸우게 된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던 카불에서 활동하는 한 신부는 이런 자신의 교파와 이득만을 생각하는 추기경들에게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꾸짖는다.
그 후의 내용은 다소 너무 영화스럽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색이 거의 없고 추기경들을 꾸짖은 추기경이 교황으로 추대되고 자신의 교황으로의 세례명은 Innocent '순수'라고 명명하며 다시 교회가 순수성과 본질을 되찾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추기경도 자신의 치부가 있었으니 바로 '인터섹스' 남성과 여성이 한 몸에 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 교회, 그리고 사회에 대한 여성의 역할이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일반사회 보다 더 천주교, 기독교 사회에서는 여전히 여자는 성직자가 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경우가 많고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공기 같은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교황이 여성성도 같이 가지고 있는 '인터섹스'로서 이것을 자신의 치부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여성의 역할도 종교계나 사회에서 더 커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중간중간 나오는 수녀들의 역할을 통해 이 마지막 장면은 꽤나 임팩트 있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정말 주된 내용이라기보다는 사회에서 있는 현상 중 하나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결국 차악이 아닌 본질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본질을 찾는 과정에서 의심을 통해 계속해서 진실과 진리에 가까워져야 하며 마지막에 정답이라고 생각했을 때조차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본질을 찾는다 해도 그 본질과 진실이 문제를 안고 있을 수 있다. 모든 교황 후보자들이 문제가 있었듯이 결국 본질에 가까운 진실이어도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이런 문제를 우리는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뢰, 믿음, 그리고 관용이 없어지고 있는 이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이 콘클라베 영화를 통해 한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제가 보고, 볼만했던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포스팅으로 남깁니다.
만일 오타나 해석 실수 등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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