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의 인생작? 존윅?
이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어 보면 단번에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는데 그 영화는 바로 [존윅(John Wick)]시리즈이다.
우선 [피그(Pig)]의 줄거리를 짧게 알아보자. 주인공 롭(Rob)은 산속에서 살아가며 돼지로 트러플을 숲 속에서 찾아내서 판매하는 트러플 헌터이다. 다소 따분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망가진 자연인(?) 롭의 생활 속에 롭은 트러플 돼지와 유대를 쌓으며 살아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돼지를 도둑맞게 된다. 롭은 트러플 중개상인 아미르(Amir)와 함께 돼지를 찾기 위해서 도시로 내려와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언뜻 존윅과 비교를 해도 거의 비슷한 줄거리를 지니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존윅의 경우 돼지가 아닌 차였고, 갱단들이 차를 강탈하는 과정에서 개를 죽여 그 분노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죽여 버리는 잔혹한 액션 영화이지만 이 [피그(Pig)]는 존윅과는 과정과 결과가 전혀 다른 드라마에 가까운 영화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영화가 홍보가 될 때쯤에는 존윅과 비슷한 느낌의 포스터, 그리고 과한(?) 마케팅으로 인해 두 영화의 결이 아주 다름에도 불구하고 비교해서 홍보를 했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90년대의 액션 스타로 정평이 나있는 니콜라스 케이지라는 배우의 이름값 때문일까? 가끔 이런 어이없는 마케팅의 홍보를 보곤 할 때마다 과연 속은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런 잘못된 사전 지식을 가지고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의 평가나 흥행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상황이 이해가 가는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가 관객에게 내세울만한 매력적인 요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인 마이클 사노스키(Michael Sarnoski)는 장편 영화로는 [피그(Pig)]가 입봉작이었기 때문에 일반 관객들은 알지 못하는 감독이었고 이런 영화에 갑자기 빅스타의 반열에 올랐었던 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온다고 하니 무언가 B급 감성의 액션일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의 평을 찾아보면 '지루하다, 재미없다'등의 부정적인 평가들도 있다.
물론 영화가 액션 영화라고 생각하고 보면 지루하다 못해 곯아떨어질(?)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영화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무언가 벌어질 듯하고 위태롭지만 정작 주인공 롭(Rob)은 과거를 감추고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철학가 된 것처럼 이상한 말만 주야장천해 낸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가서 밝혀지는 진실과 메시지를 통해 그동안의 행동이 이해가 되고 가슴이 저리게 슬프긴 하지만 통쾌하지는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있을 수밖에 없는 영화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감독의 입봉작치고는 꽤나 잘 만든 영화이기도 하고 또한 그 안에서 주는 메시지가 꽤나 강렬했기 때문에 이 영화를 '지루하다, 재미없다'의 간단한 평가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본 기억이 있는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면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느냐 이 영화는 사실... 요리 드라마 영화다. ㅋㅋㅋ 요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3파트로 구성된 이 영화의 파트 제목은 모두 요리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시골식 버섯 타르트 (Rustic Mushroom Tart), 두 번째는 엄마표 프렌치토스트와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 (Mom's French Toast and Deconstructed Scallops), 그리고 마지막 파트는 새 한 마리, 술 한 병 그리고 소금 바게트 (A Bird, a Bottle, A Salted Baguette)이다.
그리고 이런 요리들은 각각의 인물들의 상실을 대변하고 있다.
우선 첫 번째 요리이자 파트인 시골실 버섯 타르트는 주인공 롭(Rob)과 트러플 피그가 함께 나누는 음식이다. 산속에서 자연인 생활을 하고 있는 롭에게는 트러플 피그만이 유일한 동반자이다. 이런 돼지에게 롭은 요리를 해서 남는 음식이나 찌꺼기를 먹이는 것이 아닌 같은 음식 요리해서 나눠 먹는다.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음식을 나눠먹는 의미는 굉장히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수렵, 채집 생활을 할 당시에는 그 의미는 지금의 나눔보다도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롭은 현대 사회에 살고 있지만 실상은 자연인으로서 수렵, 채집 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은 나누는 것은 돼지를 단순히 가축이나 돈벌이 수단이 아닌 '가족'으로 생각을 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롭은 돼지를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떠한 과정이 있어서 이 돼지를 그만큼 아끼는지 알 수는 없지만 정상적이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챕터까지 가야지 비로써 밝혀지게 되는데 이 돼지에 투영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롭에게 돼지는 그 존재에 대신이며 끔찍이 여기는 가족이다. 하지만 이 가족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게 된다. 롭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누군가에 의해 돼지를 강도당한다. 강도를 당하면서 기절했던 롭(Rob)은 트러플 중개상인 아미르(Amir)의 돼지를 찾기 위한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아미르는 그깟 돼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새로운 돼지를 사주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롭은 거절하고 단지 돼지를 찾는데만 집중을 한다.
어쩌면 거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롭은 자신의 몸을 혹사시켜 가면서까지 돼지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이 돼지가 롭에게는 정말 중요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존재를 다시 빼앗긴 느낌이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돼지를 찾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통해 상실이란 감정을 볼 수 있다.
롭은 돼지를 통해 잃어버린 존재에 대한 상실을 다시 한번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챕터에 가서야 이 돼지가 잃어버린 아내에 대한 상실을 함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영화 속에 나오는 롭의 대사에서 돼지라는 주어나 목적어를 바꿔 '아내'를 대치시키며 롭의 필사적이고 처절한 여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는 단지 돼지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아내를 잃어버린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상실은 어쩌면 너무 간단히 소비해 버리는 느낌이긴 하다. 트러플 중개인인 아미르의 대사를 보면 그런 세태(世態)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깟 돼지 내가 사줄게요', '이제 그 정도면 됐죠, 그냥 포기해요' 등 남의 상실에 대하여 별 것 아니라는 듯한 쿨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영화가 진행되면 아미르는 스스로의 상실은 전혀 쿨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의 정신병, 자살 그로 인한 아버지와의 불화에서 아미르는 여전히 아파하고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 롭은 이 상실을 다소 거칠고 격렬하게 온몸으로 부딪히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숲 속에서 살게 된 계기 자체가 이런 상실에서부터 이기 때문에 어쩌면 예전에 격렬하게 부딪히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돼지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 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상실에 대해, 그리고 그 상실이 주는 슬픔에 대하여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상실이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버릴 정도로 큰 이벤트일 것이다.
존윅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차와 개를 통해 죽은 아내의 상실을 투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은 '그깟 차, 개'라고 이야기하지만 존윅에게는 그 상실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존윅과 롭의 다른 점은 존윅은 '분노'로 이 상실을 대처하고 있고 롭은 '슬픔'으로 대처하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그것을 되찾을 수 없지만 기억하고 노력한다.
두 번째 파트인 엄마표 프렌치토스트와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 (Mom's French Toast and Deconstructed Scallops)에서는 롭의 이야기이기보다는 또 다른 주연 배우인 아미르(Amir)와 조연 셰프 핀웨이(Finway)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상실과 그에 대한 슬픔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파트에서는 앞서 이야기했던 아미르의 이야기가 나오며 아미르의 어머니와 영화의 배경인 포틀랜드의 경제를 쥐고 흔드는 아미르의 아머지의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아미르의 어머니는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자살을 하게 되고 여전히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에 의존한 채 살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미르는 정작 병실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와 마주하지도 못하고 그의 아버지는 산소호흡기를 끊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아미르는 이러한 상실에 대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하며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마치 어머니가 아침에 만들어 주는 프렌치토스트 같은 것이다. 더 이상 먹을 수 없지만 그리운 아침. 서양에서 프렌치토스트, 팬케이크는 아마도 가정에서 먹는 아침 식사로써 가지는 의미가 크다. 아마 우리나라라면 김에 싼 밥, 소고기 묵국, 미역국 정도가 떠오지 않을까 싶다.
아미르는 아버지와는 무섭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병원에 찾아는 가지만 막상 병실 앞에서 혼잣말로 어머니와 이야기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결국 아미르의 아버지 때문에 롭의 돼지가 도둑맞았다는 것을 알고는 롭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상실과 마주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조연인 포틀랜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레스토랑의 셰프인 핀웨이(Finway)이다.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 롭과 아미르는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찾아가 해체주의 가리비 요리를 마주한다. 그리고 롭은 셰프를 콜 하게 되고 핀웨이가 롭을 알아보면서 드디어 롭의 정체가 아주 유명한 셰프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롭은 핀웨이에게 누가 자신의 돼지를 가져갔는지 알고 있지 않냐고 물어보자 자신을 대답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롭은 핀웨이를 설득하기 위해서 핀웨이를 자신의 레스토랑에서 해고하면서 나눴던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핀웨이에게 왜 항상 원했던 작은 잉글리시 펍을 하지 않았냐고 물어본다. 그리고 그런 꿈에 그리던 잉글리시 펍에서 하고 싶었던 시그니쳐 디쉬에 대하여 물어보자 핀웨이는 갑자기 모터가 달린 것처럼 '간으로 만든 스카치 에그와 허니 커리 머스터드 (Liver scotch eggs with a honey curry mustard)'라고 이야기한다. 포트렌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파인 다이닝을 운영하고 있지만 해체주의로 만든 가리비요리는 핀웨이가 원하는 형태의 요리가 아니었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투자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아니면 업계에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핀웨이는 자신의 꿈을 버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순응'을 해버리고 말았다. 요리를 하는 즐거움도, 꿈도 잃어버린 채 그저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하는 소위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두 명의 캐릭터가 보여주는 '외면과 순응'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상실에 대처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슬픔과 부정은 과거를 회상하기보다는 현실을 비관하지만 '외면과 순응'은 특이하게도 과거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미르는 중환자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어머니의 프렌치토스트를 회상하고, 핀웨이는 자신의 꿈이었던 잉글리시 펍을 항상 그리워하는 것이다.
소위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라떼'이야기는 이런 현실을 외면하거나 순응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아직 다시 현실을 살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현실을 살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과거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드물다. 하지만 과거에 잡혀 사는 사람일수록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 라떼는 말이야'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현실을 살지 못한다. 우스개 소리로 요즘 애들은 말이야 라는 말은 고대 시대에서도 쓰였다고 하니 이런 상실에 대한 태도는 인류가 시작한 이래로 계속되어 오지 않았을까?
포기나 위안이나 회복하거나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살아내야 한다!
마지막 챕터인 새 한 마리, 술 한 병 그리고 소금 바게트 (A Bird, a Bottle, A Salted Baguette)에서는 상실에 대한 또 다른 대처 방법인 '부정'과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 챕터에서는 롭이 돼지를 빼앗긴 이유가 아미르의 아버지가 아미르의 트러플 사업이 잘 되는 것을 방해해 아들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을 알게 되고 롭과 아미르가 요리를 통해 아버지를 설득하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아미르의 아버지 다리우스(Darius)는 롭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아들과 그만 거래하라고 하면서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다면 롭을 죽이겠다는 경고와 협박을 한다. 아내가 자신을 떠났듯이 아들도 떠날 것을 두려워해서 다리우스는 이런 일을 벌인 것이었다. 하지만 롭은 포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롭은 아미르에게 요리재료를 구해오라고 하고 아미르의 아버지에게 요리를 대접한다.
그리고 요리를 먹은 다리우스는 무너져버린다. 자신이 아내와 맛있게 먹었던 마지막 요리, 와인이었던 것이다. 요리를 먹은 후에 다리우스는 눈물을 쏟으며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 맛을 잊기 위해서인지 슬픔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독한 위스키로 입을 헹궈낸다. 그리고 아내를 떠나보낼 수 없는 자신을 원망한다. 다리우스는 이 불행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 상실을 '부정'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의 산소호흡기를 뗄 수도 없고 사랑하는 아들이 자신의 품을 떠나 사업을 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더 이상의 상실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리우스는 자신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현실을 '부정'하고 유지하기 원했던 것이다. 롭은 이런 다리우스에게 요리를 주면서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였고 비로소 다리우스에게서 자신의 돼지의 행방을 듣게 된다. 하지만 예상했듯이 돼지는 죽었고 돼지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을 안 롭은 그제야 오열을 한다. 이로서 상실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돼지에 투영된 자신의 아내를 잃어버린 것도 현실로 다가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난 후에 롭은 집에 돌아와 들으려고 했지만 들을 수 없었던 음악의 정체인 아내가 만들어준 테이프를 들으며 침대에 몸을 누인다. 그리고 아미르는 강박적으로 듣던 클래식 음악을 끄고 비로소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듯하다.
영화는 상실과 그 상실에서 오는 슬픔에 대하여 그것을 대처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상실을 극복하든지 극복하지 못하든지 어떻게 대처를 하든지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포기, 순응, 대응, 분노, 외면, 부정 이 모든 게 어찌 보면 우리가 대처하는 단계일 수도 있고 거기에 갇혀버린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안다고 해서 원하는 감정이나 대처법으로 상실과 슬픔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포기하기도 한다. 그것이 사람이고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 이상에는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살아내야 한다.
영화 피그는 이런 이야기를 롭의 돼지를 찾는 여정으로 풀어내고 있다. 다소 느린 전개 답답한 구성이 흠이라면 흠일 수 있지만 마지막에 영화가 던저주는 강렬한 메시지에 눈물을 훔치게 된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마이클 사노스키 감독의 영화 피그였다.
꿀꿀~!
제가 보고, 볼만했던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포스팅으로 남깁니다.
만일 오타나 해석 실수 등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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