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을 바라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위 50%에 속할 것이다.
루벤 외스틀룬드(Ruben Östlund)의 영화 [슬픔의 삼각형]에서는 사회를 삼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사회를 간단히 들여다본다면 부의 기준을 가지고 삼각형의 모형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의 경제/사회를 이루고 있는 모형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다면 관념적으로 사람들은 이 삼각형에 상위에 있을까 아니면 하위에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간단한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기존의 체계를 유지하고 싶으냐 싶지 않느냐의 차이로 그 사람이 상위나 하위의 삼각형에 들어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대부분 기존의 체계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하위 50%에 가까운 구성원이고, 유지하고 싶다면 삼각형의 상위 10%에 가까운 구성원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요즘이야 상위의 사람이든 하위의 사람이든지 간에 원하는 바가 바뀌는 특이한 경우가 있을 수 있으나 전반적인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분리가 가능할 것이다.
왜 우리는 평등을 바라는가? 영화 [슬픔의 삼각형]의 첫 장에서는 2명의 남녀 주인공의 사회적 역할로서의 삼각형을 보여주고 있다. 여자 주인공인 아야는 인플루언서이자 모델로 활동한다. 그리고 그의 연인인 칼은 무명 모델이다. 그리고 고전적인 성의 관념을 순응하는 것과 체계를 바꾸고 싶어 하는 욕구가 부딪힌다.
고전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정에 돈을 벌어오는 존재는 남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이 여자를 지켜야 하고, 식당에서 돈을 내야 하고 여성보다 돈을 잘 벌어야 했다. 그리고 여성은 지킴을 받아야 하고, 가정을 관리하며, 남성을 받들고 보조해야 하며, 남성보다는 돈을 적게 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남성, 여성관은 주인공인 아야와 칼에게는 반대로 적용이 되고 있다. 아야는 인플루언서이자 모델로 많은 돈을 벌고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여성이지만 고전적인 세계관에서는 남성이다.
반대로 칼은 오랜 모델 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명이며, 아야보다 돈을 적게 벌고, 패션쇼에 모델로 서기보다는 아야의 남자친구로서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는 고전적인 관념에서는 여성이지만 칼은 남자이다. 이런 고정관념과 사회의 구조 때문에 칼과 아야는 서로에게 불만이 있다. 문제는 이 불만은 비단 개인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남성/여성관의 괴리와 차이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의 갈등은 식사를 하면서 폭발한다. 비싼 식당에서 누가 밥을 사야 하느냐를 가지고 아무리 자신이 더 많이 버는 여성일지라도 아야는 고전적으로 남성이 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칼은 이런 고전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사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도 아니라면 더치페이를 통해 각자 내는 것도 제안을 하려 한다. 하지만 이런 고전적인 관념을 바꾸기 싫어하는 아야는 칼보다는 상위, 그리고 이런 고전 관념을 바꾸고 싶어 하는 칼은 아야보다는 하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고전적인 남성과 여성의 관념과 역할, 위치가 바뀌었음에도 상위 삼각형에 위치한 아야는 기존의 관념을 바꾸기 싫어하고, 하위 삼각형에 위치한 칼은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을 볼 때 영화는 첫 장에서부터 사회를 이루고 있는 삼각형이 바뀌던 바뀌지 않든 간에 상위에, 그리고 하위에 있는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를 통해 나뉜다는 어쩌면 처절한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둘의 싸움으로 끝이 나고 결국 별다른 해결책 없이 그냥 무던히 지나가는 해프닝 정도로 취급되며 이 영화의 첫 번째 장이 마무리 된다.
그 괴리와 모순 속에서 우두커니 서있는 중간 계급
영화는 2번째 장으로 들어오면서 조금 더 넓은 사회의 구성원을 보여주며 재미있는 부분이 생긴다. 아야와 칼만 봤을 때에는 아야가 삼각형의 상위에 속하는 인물인 것처럼 보였으나 진짜(?) 부자들과 같이 탄 크루즈에서는 아야 역시 중간 계급에 불과한, 아니 다른 부자들에 비하여 하위에 속하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크루즈를 이루고 있는 삼각형은 가장 하위에 크루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위치하고 있으며 중간계급은 아야와, 칼, 그리고 나머지들이 부자들이 상위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최상위 삼각형에 위치한 이들은 다양한 형태로 부를 축적했다. 민주주의 수호라고 하면서 무기를 만들어 파는 사장 부부, 비료를 만들어 파는 러시아 재벌, 그리고 그의 누이와 여자 친구, 또한 엄청난 돈을 받고 엑시트에 성공한 사업가, 거기에 뇌졸중으로 인해 잉덴 볼켄(구름 속에서)밖에 못 외치는 아내를 둔 부자 부부.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사람들 보다는 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들이 탄 배를 사회라고 했을 때 실질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크루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위로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아야와 칼이고, 나머지 부자들은 그 노동을 돈으로 사는 부자들에 속한다. 마치 설국열차의 꼬리칸과 상위칸을 연상케 하고 현대 사회를 정말 잘 보여주는 이 크루즈의 구성은 소름 돋는 은유에 가깝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이 배를 이끄는 선장은 알코올 중독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인 이상주의자이다.
사실 사회라는 것은 배가 순풍에 순항을 하듯 지나가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어떤 가정, 회사, 사회단체, 국가 등 사람이 모인 모든 곳에 적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단체가 정말 문제가 없는지 혹은 문제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위기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왜 사람들이 블라인드나 혹은 익명 게시판에 뜰법한 내용이 나왔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겠는가?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덮어두고 앞으로만 나가다 문제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크루즈라는 사회가 문제없는 듯이 순항 중일 때는 선장이 술에 취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히려는 때 모든 사람들은 패닉에 빠진다. 불안한 배를 보며 크루즈 직원들은 부자들에게 계속해서 먹고 마시라고 한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지 못한 채 부자들을 계속해서 먹고 마시기 시작하고 소위 배의 리더라고 하는 선장과 러시아 재벌은 말도 안 되는 주장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폭풍우를 이겨낼 수 있는 길을 제시하지 않는다. 마치 정치인들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하며 서로 자신들의 할 말만 하다가 회식 장소에서 선배님 후배님 하면서 회포를 푸는 느낌이다.
그리고 폭풍우가 심해지자 드디어 부자들은 자신이 먹었던 모든 것을 토하기 시작한다. 마치 사회가 크나큰 사건으로 뒤집히기 시작하면 대부분의 군림하던 사람들의 부정부패가 드러나고 그 대부분의 것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물론 요즘 세상에서 이런 권선징악이나 사회가 뒤집힐만한 계기가 많이는 없지만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문제가 생기면 이렇게 기존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토해내기 시작한다. 하나의 예로 세월호라는 큰 사건 때문에 시작된 탄핵으로 정권이 바뀌며 기나긴 진보진영의 집권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힐 것 같지만 뒤집히진 않았다. 어찌 보면 이 크루즈라는 사회가 큰 역경을 이겨낸 것이다. 하지만 이 뒤처리는 배에서 일하는 가장 하층민인 사람들의 몫이다. 크루즈의 일하는 사람들조차도 두 계층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덱에 나와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과 배 밑에서 덱에는 나오지 못하고 고객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야 나와서 청소하는 청소부, 요리사, 정비공들이 있다. 영화는 부자들과 크루즈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도 토한 토사물들과 난장판을 이 사람들이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기한 점은 하층민부터 중간층에 있던 칼은 토하지 않는다. 하층민은 일을 하고 칼은 아야를 케어하더니 그저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이 일련의 사건을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삼각형이 뒤집혀도 중간 계급은 여전히 중간에서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폭풍어 정도로는 사회가 뒤집히지 않았다. 여전히 사회가 완전히 뒤집힐 정도의 격변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사회의 삼각형은 굳건히 서있다.
이렇게 배가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지만 갑자기 해적이 들이닥쳐 배를 폭파시켜 버리게 된다.
이제 정말 사회가 뒤집혀 버리는 격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실 우리는 군림하려 하지 평등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배가 폭발을 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한 무인도처럼 보이는 섬에 안착하게 된다. 이제 삼각형이 뒤집힌 것이다. 이 섬에서 원래 부자인 사람들은 똑같이 군림하려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들이 가진 부는 전혀 소용이 없다. 오히려 몸으로 일하고 사냥이나 생존 스킬이 있는 사람이 더 각광을 받고 상위 사회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인물은 배에서 가장 밑에 있었던 청소부 아비가일이다. 아비가일은 사냥, 요리, 쉘터 구축 등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섬이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가장 권력이 있는 사람으로 등극하게 된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 아비가일이 하자는 대로 그리고 시키는 대로 일을 하기 시작한다. 마치 폭군의 재림인 것처럼 아비가일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사회를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다만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부분은 중간 계급이었던 칼이 사회가 뒤집혔지만 그대로 중간 계급이라는 점이다. 삼각형의 중간은 역삼각형이 되어도 중간인 것처럼... 칼은 자신의 몸을 사용해 아비가일의 남창으로서 살아간다. 변변한 스킬이 없던 그는 몸을 이용해 아비가일에게 쾌락을 선물해 주고 식량을 배분을 받는다. 그렇게 사회가 바뀔만한 이벤트에서 중간 계급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뀐 세상과 사회에서도 여전히 그 중간 계급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섬이 사실은 리조트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아비가일과 아야가 산을 탐방하던 중 리조트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를 발견하고 다시 이 사회는 원래의 삼각형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그 삼각형에서는 다시 하층민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야는 아비가일에게 자신을 위해 일해달라고 하지만 아비가일은 돌을 집어 들어 아야를 공격하려고 하고 마지막으로 칼이 수풀을 헤치며 어딘가로 뛰어가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결국 상위 계급이었던 자는 혹은 상위 계급인 사람은 그 권력을 어떻게든 유지시키고 싶어 하고 또한 그를 위해 불법이든지 살인이든지 극단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 우리는 사람들을 부리고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우리는 평등을 바라는 이유는 우리가 상위 계급에 속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성악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 선에 가까이 있더라도 선에 가까워지지 않지만 악에 가까워질수록 악해진다. 인간은 약하기도 하지만 우선 악하다. 평등은 우리가 아래 계급으로 상위의 계급을 타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상위 계급이 평등을 말하는 것 역시도 그것을 희망으로 삼아 아래 계급을 억누르려는 수단인 것이다.
제가 보고, 볼만했던 드라마, 영화, 다큐멘터리 등을 포스팅으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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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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